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작 뉴턴 (문단 편집) === [[신학자]]로서의 뉴턴 === 뉴턴은 과학 분야보다 오히려 더 많은 분량의 신학 관련 문헌을 남겼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전문 신학자로 간주될 정도로 신학 전문가로 인정받았고, 많은 사상가들과 신학이나 종교에 관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다. 뉴턴은 표상과 이데아 사이의 일치성을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받았고, 이것은 고전 ~ 중세 신학의 연구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일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본인이 종교에 대한 의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부정하였고''', 더 나아가 기독교가 삼위일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 본문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삼위일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후 [[요한의 콤마|요한 1서 5장 8절]]에 의도적으로 첨가된 구절도 뉴턴이 증명한 것들 중에 하나이다. 이는 [[성공회]]의 견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고, 당시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행위는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감옥에 갇히거나 까딱하다가는 사형까지 당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뉴턴은 자신이 공들여 쓴 '삼위일체 반박 논문'의 출판을 생이 끝날 때까지 주저하였다.[* 하지만 성공회 측도 뉴턴의 신학 이론이 자신들의 견해와 불일치한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전에 존경받던 대과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황청의 총애를 받다가 단 한 번 교회의 견해와 반대되는 저작을 썼다는 이유로 한 번에 매장된 일이 워낙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자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고 자국이 낳은 걸출한 천재를 자기들 스스로 매장해버리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으려고 그에게 경고만 주고 눈감아줬을 뿐이다.] 결국 그가 죽은 후에 방대한 종교 문헌 중 4가지만 사후에 출판되었고, 나머지 원고는 20세기 들어 경매를 통해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 이때 산 사람이 경제학자 [[케인즈]]다.] 경매 이후 뉴턴의 신학과 종교, 연금술에 관한 원고는 전 세계에 분산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측정과 연구가 어려운 상황이다. 뉴턴이 남긴 기록을 단어 수로 본다면 과학과 수학에 관해서는 100만 단어, 연금술에 관해서는 55만 단어, '''신학과 종교에 관해서는 140만 단어'''로 추정된다. 양으로만 따지면 과학자가 아니라 신학자라 불러야 할 수준. 뉴턴의 학문적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어서 과학, 신학뿐 아니라 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경제학자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도덕 철학자였던 [[아담 스미스]]가 있다.] 성경에 근거해 종말을 계산하기도 했다. 그는 세상의 종말이 [[2060년]]에 일어난다고 보았는데, 당시 온갖 [[종말론]]자들이 이런 저런 소리를 하는지라 성경 말씀의 권위가 훼손되는 게 통탄스러워 직접 나섰다고. 이하는 그의 추론. >1. [[다니엘서]] 7:25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 근거함. > >2. "한 때"를 1년, 즉 12개월로 보면 '한 때 + 두 때 + 반 때 = 12개월 + 24개월 + 6개월 = 42개월'임. > >3. 42개월은 [[요한 묵시록]] 11:2의 "마흔두 달"과 요한 묵시록 11:3의 "천이백육십 일"과 도 일치함. > >4.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면 '''1260년'''이 흐른 후 종말이 옴. > >5. 기산 연도를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 자리를 받은 서기 '''[[800년]]'''으로 잡음.[* 이때를 기해 유럽에서의 교황권이 막강해졌다.] > >6. __800+1260=2060년__ 사실 뉴턴의 진의는 2060년이 되기 전까지는 종말 같은 거 안 오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말자는 것에 가까웠고, 엄밀히는 종말이 아니라 성경에 일렀듯 새 세상이 열린다고 보았다. 사실 기독교적 입장에서만 본다고 한들 예수부터가 [[마태오 복음서]] 25장에서 마지막 때를 알지 못한다고 한 바 있으니, 괜히 호들갑 떨거나 흑화하지 말고 그냥 뉴턴이 이런 것도 연구했구나 정도로만 보자.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99359|#]]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1646년 ~ 1716년)^^는 미적분을 누가 먼저 발명했느냐를 놓고서 뉴턴과 다툼을 벌인 인물이다. 그는 뉴턴의 ‘숨은 인력적 속성’이 ‘진정한 철학의 여러 원리들과 어긋날’ 뿐 아니라 ‘무지의 낡은 도피처’로 되돌아가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뉴턴 옹호자들은 중력은 단지 물질의 근본적인 성질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서, '''뉴턴 자신은 정말로 중력의 원인을 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해답을 찾기 위한 그의 방법을 본다면, 뉴턴은 17세기에 우연히 태어난 ‘근대과학자’가 아님이 드러난다. 뉴턴은 평소답지 않은 겸손한 태도로 자신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재발견했을 뿐이라고 여겼다. 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던 법칙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뉴턴은 프리스카 사피엔티아{{{-2 (prisca sapientia)}}}를 믿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이 개념은 ‘고대의 지혜’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타락했다고 여겼다. '''뉴턴은 그리스신화, 성경 구절, 그리고 『헤르메티카』를 해석하여, 그 속에 자신의 중력 법칙을 포함한 세계의 숨겨진 구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음을 밝혀내려고 애썼다. 뉴턴의 생각으로는, 중력이란 신이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여해서 생긴 결과였다{{{-2 (그리고 고대인들도 같은 생각이었으리라고 뉴턴은 믿었다)}}}.''' 신의 기하학적 청사진을 밝혀냈다고 여긴 케플러처럼 뉴턴도 자신을 {{{-2 (단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고대의 지식을 복구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라고 여겼다. >---- >Lawrence M. Principe[* 존스 홉킨스 대학의 과학기술사학과 및 화학과 교수. 주요 연구 분야는 중세 말 ~ 근대 초 과학사이다.], 『과학혁명』 {{{-2 ''THE SCIENTIFIC REVOLU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노태복(역) 물론 뉴턴에게 신학적 동기가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사와 달리 신학사의 관점에서 뉴턴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신학사의 관점에선 동시대의 [[라이프니츠]]가 훨씬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의 신학적 동기가 새삼스럽게 주목 받는 이유는, 오늘날의 과학자 이미지를 과학혁명의 시대로 소급하여 "현대 과학자도 이러하니 옛날 과학자도 이러할 것이다"라고 넘겨짚는 오류를 정정하는 가장 강력한 예시이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의 시대에 과학자 집단은 반종교적인 집단도 아니었고, 회의론적인 집단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신학적 동기는 세계에 대한 탐구의 강력한 추진력이었다. 이는 [[과학혁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뉴턴에게도 적용된다. >가령,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은 인간, 신, 그리고 자연계 사이의 긴밀한 관련성을 확신했으며, 이로써 신학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 사이에 상호관련성이 있음을 확신했다. 따라서 '''당시에 논의된 주제들은 과학과 신학/종교가 뒤섞인 복잡한 성격을 띠었다. 근대 초기의 자연철학을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여러 가지 상식적인 가정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거의 모든 유럽인, 특히 이 책에서 거론된 모든 과학사상가는[* (발췌자 주석) AD 1500-1700년의 과학사상가들.]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적이든 아니든 간에 과학 연구에는 무신론—에둘러 표현하자면 ‘회의론’—이 필요하다는 개념은, 과학 자체를 종교로 삼길 바라는 {{{-2 (대체로 자신들을 그러한 종교적 위계질서에 포함시키는)}}} 이들이 제안한 20세기의 신화다.''' 둘째, 근대 초기의 경우 기독교 교리는 의견이나 개인적 선택이 아니었다. 당시의 기독교 교리는 자연계의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에 맞먹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신학적 이론이나 예배 관행의 고차원적인 지점을 놓고서는 교파 간에 분명 이견이 존재했다. 마치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중력의 실재성이나 원자의 존재 또는 과학적 연구의 타당성을 의심하지는 않으면서 아주 미세한 지점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결코 ‘개인적 믿음’의 지위로 전락한 적은 결코 없었다. 오늘날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신학은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들의 요체이자 존재에 관한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탐구 행위였다. 그렇다보니 '''신학적 교의들은 근대 초기 자연철학자들이 연구 자료로 쓴 데이터 집합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신학적 사상들은 과학 연구와 추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단지 과학 연구의 바깥에서 얼마간의 ‘영향력’을 미친 정도가 아니라, 신학적 사상은 자연철학자들이 연구하던 세계의 필수적이고 중요한 일부를 차지했다.''' >---- >Principe, 같은 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